김은희의 추리극에 나타난 기억과 폭력의 양상 연구: TV 드라마 <싸인>, <유령>, <시그널>을 중심으로

Study on the aspect of memory and violence seen in Kim Eunhee’s detective-drama: Mainly on the basis of TV drama <Sign>, <Phantom>, <Signal>
  • 김민영

초록

1997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시장 중심의 무한 경쟁 논리를 전면화시키기 시작하여, ‘자유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주체를 요구했다. 국가안전망이 해체됨에 따라 공동체가 와해되고 사회 구성원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로써 붕괴하는 공동체 속에서 노동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주체 혹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주체로 변화되기를 강요받았다. 이 사회는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자본주의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시키며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금융자유화가 추진되면서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가계부채는 사회 구성원의 개개인의 삶의 위험을 사적(私的)으로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한국 사회는 정의를 위한 국가시스템의 근간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사회 구성원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주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가시적 국가 체제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간 전통 문학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폄하되었던 추리 장르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추리’는 시청률을 담보할 수 있는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점차 서사구조와 영상미학적 측면에서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 중 <싸인>, <유령>, <시그널> 등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는 시청률은 물론이고 구조적 완결성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전면에 내세운 이 사회가 은폐하고 싶은 기억이나 사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추리 서사의 약진 속에서 그간 빈번히 다루어진 것은 주로 사적(私的) 복수의 측면이었다. 하지만 김은희의 작품은 사적 복수를 지양하고 공적(公的)인 서사로 전환하여 제시한다는 것이 차별적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은 사회 구성원의 삶을 위협하는 은폐된 국가 체제 시스템 그 자체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사회 구성원들 개개인의 책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시스템의 실패를 사적 차원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김은희의 일련의 드라마에서는 국가가 은폐하려는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와 폭로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은폐시키려 혈안이 되었던 사회 체제 자체의 근본적 폭력과 모순을 바로 보게 한다. 공권력과 사회 고위층의 굳건한 결탁 관계,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법적 처벌이 불가능한 무법 지대의 자본 권력, 과잉된 욕망의 주체 등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점차 핵심적 장르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추리 서사는 한마디로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사유 재산의 확대, 범죄의 증가와 더불어 과학의 발달은 추리 서사의 정착을 촉진시켰다. 합리적인 이성을 바탕으로 범죄를 해결하려는 탐정이 눈에 쉽게 보이지 않은 감춰진 증거를 찾아내고 분석하여 범인을 밝히는 추리 서사는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추리 서사의 장르적 본질은 탐정 혹은 탐정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근대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보통의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범죄 사건의 핵심적 단서를 찾아내어 범인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사소하고, 모른 채 지나쳐도 상관없을 세부적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신분석’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우연한 행위나 실수를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며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 혹은 그 무언가를 수면 위로 올리고 싶은 의도가 억압된 것이라 여긴다. 즉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들,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며 놓치기 쉽고 지나쳐 버리기 쉬운 작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추리적 사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추리 서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사항, 놓치기 쉬운 단서, 설령 단서를 놓치고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잉여’적 측면이다. 그간의 추리 서사는 탐정이 주축이 되어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다시 말해 탐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증거가 아닌,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숨겨진 정보를 찾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탐정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범죄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뒤집어서 추리 서사를 보려 한다. 즉 범죄 사건의 단서,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증상’이 탐정에게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작품들을 바라본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잉여적인 요소인 ‘증상’을 탐정이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탐정이 잉여적 요소인 증상을 스쳐 지나갈 때 증상이 느닷없이 돌출하여 능동적·자발적으로 자신을 탐정에게 드러낸 것으로 인식의 벡터를 뒤집은 것이다. 이는 원귀가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사건을 해결할 힘이 있는 권력자에게 의탁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분명히 존재하는 잉여적인 요소인 ‘증상’은 탐정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서 표현해달라고 요구한다. ‘증상’은 이유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탐정에게 발견되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증상’은 그 자리에서 탐정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달라고, 은폐된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호소한다. 이는 탐정이 증상을 일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증상 또한 탐정을 이미 바라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의 관점을 바탕으로 이 글은 ‘김은희의 추리물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을 찾고자 하였다. <싸인>의 법의학자, <유령>의 경찰, <시그널>의 프로파일러 등의 탐정들이 찾아낸 ‘증상(실마리, 단서)’이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장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건의 해결은 증상들이 탐정에게 출몰한 이유는 무엇인지, 탐정에게 채워 달라고 요구하는 그들의 욕망은 무엇인지, 탐정이 모른 척하고 은폐하고 싶어 하는 과거의 기억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은폐된 기억, 숨겨진 단서 또는 봉인된 증상은 우리 앞에 출몰하여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이다. 결국 김은희의 추리물은 증상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봉인 당한 증상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요구한다. 이 글은 <싸인>, <유령>, <시그널>에서 은폐된 기억을 소환하고 복원하는 양상을 미적 장치 분석과 작가의 정치학으로 나누어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미적 장치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사회 구성원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국가는 <싸인>에서 서윤형의 죽음, <유령>에서 신효정의 죽음, <시그널>에서는 박선우의 죽음을 한낱 개인의 희생으로 전락시킨 채 진실을 은폐시킨다. 이에 탐정은 사건의 잉여, 즉 이들의 죽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며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김은희 추리극은 습관처럼 익숙해진 현실의 상황을 바로 보고 사건의 잉여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어주어야만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가 한국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사건의 잉여를 마주하기를 요청한다. 다음으로 이 작품들의 시공간은 가시적인 시선의 소유자가 비가시적인 영역에 감춰지고 은폐된 증상(단서, 잉여 등)을 발견해야만 권력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즉 잉여적 정보가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싸인>에서 법의학자의 시선과 특수부검실의 구조는 시체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영역이 많아진다. 또한 <유령>에서 사이버 공간은 특히 비가시적인 물질인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곧 권력이 되는 공간이다. <시그널>은 평면적인 시간 개념을 넘어서 과거의 사건이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는 ‘미제사건’을 소환하여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김은희의 추리극은 비선형적 서사 구조, 대표적으로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서술되지 않은 공백’을 채워, 놓쳐버린 정보를 보완하고 시간의 순서를 재구성하여 사건의 원인과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곧 현재 이전의 시간인 과거로 되돌아가서 기원을 찾는 여정이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부검실에서 죽은 자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법의관, 생각지도 않은 우연한 재회를 통해 무의식의 기억과 마주하는 경찰, 망각하고 지냈던 과거 기억을 소환하고 마주보는 프로파일러 등을 모두 ‘사건’에 합류되고,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귀를 닫아버린 채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이 사회가 은폐한 미시적 폭력을 알아차리게 만들어 준다. 한편 작가의 정치학을 살펴본 분석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국가에서 담당해야 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져 버린 이 시대에는 개인의 안전은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존재가 배제되고 격리될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김은희의 추리극은 국가안전망이 사라져 버린 결과 해결되지 못한 사건, 즉 유령과도 같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던 미제사건을 소환한다. <싸인>의 미군 총기사건 및 일본 백골 사체, <유령>의 성연고 괴담, <시그널>의 장기 미제사건 등과 같은 미제사건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은폐된 국가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낸다. 또한 김은희의 추리극은 정보를 일종의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고 독점함으로써 권력 형성이 가능한 이 사회의 일면을 담아낸다. 공권력과 결탁한 정·재계가 정보 유통 시스템을 장악하여, 비가시적이고 산일적(散逸的)인 정보의 독점과 사적 전유가 곧 이익이자 권력이 되는 시대, 이것이 현재 우리가 속한 사회이다. 정보의 점유 자체가 권력이 되는 이 시대는 정보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이전의 권력과 형식만 바뀌었을 뿐 권력 구도는 변함이 없다. 즉 김은희 작가는 정보자본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무능력하므로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기존의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은 미시권력으로 변모해서 우리 일상을 잠식하고 있음을 시청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김은희 작가는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파편적이고 모순으로 가득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다루며, 작품 속에 ‘낙관적이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김은희는 언어와 법으로 구성된 상징적 세계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흔적이나 증상 혹은 잉여적인 것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고 이를 시청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디제시스 안에서는 시적 정의가 구현되었지만, 우리가 속한 현실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결국 김은희 작가가 진정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망각해서는 안 되는 봉인된 역사의 목소리, 억압된 징환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김은희의 추리극은 시대적 증상이 끊임없이 출몰하는 현실을 재현하면서도 결국엔 시적 정의를 실현하여 봉합함으로써 불가능한 미래를 환상적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은 분명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희의 세계관은 현시대의 문제를 한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여 사적 복수를 하는 것을 지양하고 공적인 측면으로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시청률이 일정 수준으로 나왔다는 것은 작가의 세계관을 긍정하며 지지를 보내는 시청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의 작품들이 대중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싸인>, <유령>, <시그널> 등 각각 개별 작품의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의 추리 서사가 진일보할 수 있도록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의 가치는 입증되어야 한다. 결국 <싸인>, <유령>, <시그널>은 상업성, 대중성, 공공성을 담보로 한, 이 시대의 기념할 만한 추리 서사라 할 수 있겠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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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은희의 추리극에 나타난 기억과 폭력의 양상 연구: TV 드라마 <싸인>, <유령>, <시그널>을 중심으로
제목 (타언어)
Study on the aspect of memory and violence seen in Kim Eunhee’s detective-drama: Mainly on the basis of TV drama <Sign>, <Phantom>, <Signal>
저자
김민영
발행일
2019
저널명
인문콘텐츠
53
페이지
341 ~ 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