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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은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대만인의 반응과 경찰에 대한 이미지를 분석함으로써 대만사회의 피식민 경험이 어떠하였는지를 드러내보이고자 한 연구이다. 일본은 1895년 대만을 할양받았으나 대만인의 저항으로 1902년 비로소 식민통치의 기초를 확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일반 행정사무도 수행하는 ‘경찰정치’가 행해지게 되었고, 나아가 ‘理蕃’정책까지 집행하게 된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내지연장주의’정책 하에서 경찰제도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그 직권이 워낙 크고 보갑을 지배하고 있어서 여전히 일반행정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황민화운동 실시 이후 전시체제로 진입하면서 경제통제와 전쟁동원을 위해 ‘경찰국가’의 색채는 더욱 농후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시기 대만경찰은 시종 식민통치의 첨병으로 식민정부를 대표하여 거의 모든 정책을 집행하고 간여하는 ‘경찰만능’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일본 점령 초기 대만 지주자산계층은 대부분 항일투쟁을 포기하고 內渡 내지 隱居하거나 신정권에 협력하는 길을 택하였고, 총독부의 포섭정책과 보갑제도 실시 후에는 식민행정의 보조역할을 맡거나 식민통치에 협력하게 된다. 또 자신의 자제를 신식학교에 입학시키거나 일본에 유학 보낸 결과 이들이 1920년대 이후 신흥엘리트로 성장하여 그 다수가 식민체제의 한 축을 맡게 된다. 한편 그 일부는 차별정책에 대한 다양한 저항을 시도하였는데, 그 중에는 경찰과 보갑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노력도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특히 황민화운동 이후에는 동화와 협력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외 다른 저항 방법이 없었다. 노동자농민계층의 경우 일제 초기 무장투쟁에 가담한 良民이 기회주의적인 협력자보다 많았지만 대다수는 점차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순응한 것은 아니었고 식민통치가 확립되고 동화정책이 강화되면서 차츰 체제 내에 편입되어, 식민지 말기에 오면 침략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반면 경찰에 의한 위생환경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민중들이 위생관념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점은 식민권력의 한계 및 근대와 전통의 길항관계를 보여준다. 한편 점령 초부터 산지의 자원을 개발 약탈하려는 식민당국에 저항하였던 원주민들은 총독부의 대대적인 토벌에 결국 굴복하였고, 이후 경찰에 의한 교화정책 하에 점차 동화되어갔다. 하지만 霧社사건과 高砂義勇隊 지원 동기를 통해 동화의 강한 흔적과 함께 강요된 동화의 허상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일제시기 신문과 소설에 묘사된 경찰의 모습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폭력적인 형상으로 특히 임산부와 어린아이에 대한 폭행에서 그 포학한 이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 이런 폭력성은 대만인 巡査補의 경우 육친도 몰라보는 패륜과 이중적 처세로 인해 더 심한 비판과 풍자의 소재가 되었다. 폭력 다음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미지는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 않은 것은 비일비재한 일인데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미지는 호색으로 소설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종종 발생하였으니, 이처럼 직권을 남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경찰의 심리에는 피지배자를 멸시하는 오만함이 깔려 있었다. 대만경찰이 원성의 대상이 된 데는 그 권한이 너무 큰데 반해 자질이 보편적으로 나빴고 당국이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지만, 이에 대한 문제 제기와 개선 요구가 반영되지 않음으로써 그 부정적 이미지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소설 속 경찰 이미지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을 수 있고 또 모든 경찰이 악행만을 일삼은 것은 아니지만, 경찰의 폭력과 탐욕, 호색과 오만한 이미지는 식민지 이후에도 대만인의 뇌리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고 이런 ‘공포’ 이미지가 다음 세대에도 전승되어 피식민 경험의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점에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키워드
- 제목
- 日帝 식민통치에 대한 대만인의 반응과 경찰 이미지
- 제목 (타언어)
- 日治時期台湾人对殖民统治的反应和警察形象
- 저자
- 손준식
- 발행일
- 2010
- 저널명
- 역사문화연구
- 호
- 37
- 페이지
- 171 ~ 206